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혼노지의 변 (문단 편집) ==== 조정 흑막설 ==== 노부나가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미츠히데를 사주했다는 설. 사주의 주체로는 [[오기마치 덴노]], [[사네히토 친왕]], [[고노에 사키히사]] 등의 문신세력 등이 제기된다. 노부나가는 [[태정대신]], [[관백]], [[정이대장군]](쇼군) 이 셋 중 어떤 직책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겠다는 사네히토 친왕의 서찰을 받고도 이에 답을 하지 않고 돌려보냈었다. 조정의 의도는 노부나가가 쇼군 직을 원할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서찰을 보낸 것이었지만, 노부나가가 답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자 노부나가가 이전의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에서 행했던 것처럼 조정과 협조하는 체제 대신 조정을 제압하고 허수아비로 만들려는게 아닌가라고 불안감을 느꼈다는 해석이다.[* 쇼군인 정이대장군과 함께 태정대신, 관백 이 세 관직은, 천황가 아래 최고위 귀족인 [[고셋케]]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에 있어서 신분 상승의 최고 정점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이보다 의전상 위에 있는 직위는 황족 밖에 없었다. 쇼군은 당대 일본의 실권자이며, 태정대신과 관백의 권한과 위상은 조선으로 치면 각각 [[영의정]]과 [[섭정]]에 해당하는 조정의 중추이자 대표였다. 이런 자리를 셋 모두 제안했는데도 노부나가는 전부 거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삼관추임문제]](三官推任問題) 참조.] 조정 흑막설의 근거로는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를 평정한 뒤 미츠히데가 조정에 들어가자 조정에서 미츠히데의 공을 치하하며 금품을 하사한 점, [[오다 노부타카|간베 노부타카]]가 고노에 사키히사에 대해 대해 추토령을 내려 집요하게 행방을 뒤쫓은 점, 당대의 중요 기록인 겸전어기에 혼노지의 변의 전후 1개월의 상황이 빠져있다는 점등이 꼽힌다. 당시 조정에서는 '노부나가가 바쿠후의 쇼군이 아니라, 조정의 중요 정무직책인 산쇼쿠(三職)를 요구하려는게 아닌가.'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온 것을 사네가와 친왕의 서찰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고 노부나가가 쇼군이 아닌 산쇼쿠를 원한다는 대답을 하는 것을 막기위해 혼노지를 쳤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정 흑막설 역시 여러가지 반론이 제기된다. 노부나가가 산쇼쿠가 아닌 쇼군에 취임하겠다고 대답하려고 혼노지에 온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흑막의 한 명으로 지적되는 고노에 사키히사는 대표적인 친노부나가 [[공가]] 중의 한 명이며,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 노부나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와카(和歌)를 남겼고 출가까지 했다. 간베 노부타카가 고노에 사키히사의 행방을 뒤쫓은 것은 그가 흑막이라서라기 보다는 니조 성의 바로 옆에 있던 고노에 사키히사의 집의 지붕에 아케치 군이 올라가도록 허용한 것을 따지기 위함이었다는 지적 역시 존재. 또한 [[오기마치 덴노]]나 사네히토 친왕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사네히토 친왕은 니조 성의 싸움에 휘말려 위험할 뻔 했던 사실이 알려져서 조정 흑막설의 반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뒤에 조정에서 내린 칙서나 칼의 하사에서 미츠히데를 칭찬한 부분이 없고 미츠히데 자신도 조정의 칙명을 받아 노부나가를 쳤다고 말한 바가 없다는 점이 가장 강력한 반론의 근거로 제기된다. 만약 미츠히데가 조정의 은밀한 칙명을 받은 것이라면 '왜 조정에서 그에게 전혀 혜택을 주지 않았는가?'라는 모순이 생기는 탓이다.[* [[토사구팽]] 내지는 증거인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혼노지의 변은 성공했고 오다는 확실히 죽었다. 조정 입장에선 딱히 숨길 이유가 없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